불교설화

창작이 없는 지식은 타버린 재와 같다.

윤법종 2018. 8. 4. 17:13



작이 없는 지식은 타버린 재와 같다

‘어느 날 부처님께 죽은 자식을 앉고 와 약을 구하는 여인이 있었다.

일찌기 가난한 집에 태어나 몸이 허약하여 이름을 키사코다미(약순이)라 불렀는데 천행으로 결혼만은 부자집으로 하여 의식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일찌기 자식을 낳지 못해 무진 애를 쓰다가 늦게나마 한 자식을 얻으니 때마침 옥동자라 시가(媤家)의 경멸과 학대는 일시에 총애로 변하여 자식과 여인은 마치 쟁반위의 구슬처럼 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토실토실 무병하게 자라던 아이가 급작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사방팔방(四方八方)으로 약을 구해 써 보았으나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라 마침내 애는 죽고 말았다.

미처버린 어미는 그 애를 등에 업고 ‘우리 아기에게 약을 주십시오. 우리 아기에게 약을 주십시오.’하고 슬피 울면서 돌아 다녔다. 사람들은 비웃었다. 그러나 아랑곳없이 그 여인은 오늘은 이 마을 내일은 저 마을로 쏘다니며 약을 구했다.

이 가련한 여인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저 사람에게 약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부처님뿐이다.’ 생각하고 어떤 착한 사람이 부처님께 안내했다. ‘부처님 약을 주십시오. 내 아이에게 약을 주십시오.’하고 엎드려 울었다.

‘그래 약을 주지, 너의 귀여운 아기를 꼭 살릴 수 있는 약을 줄 터이니 마을에 내려가 아무집에서나 겨자씨 조금만 얻어 오너라. 단지 한번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여인은 밖으로 나왔다. 누구도 그 가련한 여인의 말을 듣고 겨자씨를 주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여인은 물었다. ‘혹시 이 집안에서 일찌기 사람이 죽은 일은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몇년 전에는 귀여운 자식까지 잃었답니다.’

‘그렇다면 이 겨자씨를 받을 수 없습니다.’ 여인은 또 다음 집으로 갔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종일토록 이집에서 저집으로 이마을에서 저마을로 헤매 보았으나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었다.

‘아! 사람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서산에 해가 떨어지고 동산에 밝은 달이 솟아오를 무렵 그 여인의 가슴에 경각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곧 아이를 화장터에 버리고 부처님께 달려갔다.

‘겨자씨를 구해 왔느냐’

‘부처님, 이제 그 일은 끝이 났습니다. 존경하는 부처님, 오직 저를 불쌍히 여기사 저의 귀의를 받아 주십시요’

‘착하다 여인이여, 떳떳한 것은 다 헤지고 높은 것은 떨어진다. 만나면 이별(離別)이 있고 생자(生者)에겐 멸(滅)이 있다’ (會者必離요 生者必滅이로다)

여인은 슬픔을 잊고 밝은 눈빛으로 부처님을 바라 보았다- <파리어본(巴利語本) 증지부경(增支部經)>

  

개념적인 무상, 개념적인 무아, 개념적인 지식은 결코 탄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각은 이와같은 일반적 지식과는 달리 깨달음의 세계로 옮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무상이니 무아니 무소유니 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얼마나 쉽게 말하던가? 그러나 사람들은 일을 당하면 이성을 잃고 이 여자를 닮아 간다. 만일 그 여인이 부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모든 사람들의 경멸과 허탈 속에 죽어 갔던지 더 미쳐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 설사 살았다하더라도 그는 혼없는 인형처럼 바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선지자(先知者)의 지혜(智慧)이다.

불타는 이러한 교육법으로 모든 중생들을 교화했다. 짜여진 교안대로가 아니면, 배운 지식대로가 아니면, 아니라고만 하지 않았던가, 사람의 생각이 꼭 같지 아니하므로 그를 대처하는 기지(奇智) 또한 같을 수 없다.

창작이 없는 지식은 타버린 재와 같다. 배우기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창안이 있고 창조가 나와야 한다. 스스로의 생각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 고등학교까지는 지식의 습득기간이라면 대학은 창조적인 그 무엇을 양성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따라서 대학입학시험은, 대학교육은, 창조적인 것을 길러주어야 한다. 학벌이 아닌 졸업장이 아닌 실력도 아닌 그 무엇을 길러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죽은 아이를 살리는 곳이 아닌 것이다. 신일그룹의 보물선에 투자자들이 그렇다. 죽은 아이를 살리겠다는 여인과 무엇이 다른가?


쥐면 하나고 펴면 열이되 듯 뱃속의 똥을 안고 있다가 배설하니 더럽다고 하듯이, 사람들이 어리석어, 보아 쓸 줄 모르고 있다, 때만 기다리고 있구나.




'불교설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도자가 열반에 이르는 경로  (0) 2019.07.21
天地懸隔  (0) 2018.10.05
배은망덕  (0) 2018.07.22
  (0) 2017.06.27